잉여인간으로 살지어다
잉어인간? 잉여인간!
잉여인간은 새로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적지 않게 잉여인간에 대해 들어 왔을 것이다. 사실상 자신을 그렇게 칭하는 부류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잉여인간이란 단어는 언제 어디서부터 나온걸까?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유형으로 당시 이 캐릭터는 민족의 원형이 될 정도로 인상적이며 교육수준이 높은 지식인·귀족출신으로 묘사 되어있다. 이들은 이상주의와 정의에 가득 차 있지만 햄릿의 경우만큼이나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행동에 뛰어들지 못하며, 주위의 불의와 어리석음을 깨닫고도 방관자의 입장을 고수한다. 극단적인 예로써 이반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 Oblomov〉(1859)의 주인공을 들수 있다. 그는 게으른 몽상가 귀족으로, 한 번도 직접 방문한 적이 없는 영지의 수입으로 살아간다. 그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 언제 일어날까, 그리고 일어난다면 무엇을 할까 궁리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 인물은 19세기 러시아의 특수한 문제이자 농노제의 부산물로써 생겨난 잉여인간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잉여인간의 기원
우리나라에서의 잉여인간 등장
우리나라에서 잉여인간이란 말은 손창섭(1958)의 단편소설 제목으로 맨 처음 등장을 뒤로 2004년 영화 '말죽거리잔혹사'에서도 잉여인간이라는 말을 찾을 수 있다. 영화의 나레이션 부분에 "나는 잉여인간이다, 더 이상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 라는 말이 나온다. 시대는 변하고 잉여인간을 표현하는 분야도 달라졌지만 잉여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특성은 같다고 볼 수 있다. |
이렇게 과거나 지금이나 잉여인간의 출현에는 이들이 이렇게 밖에 될수 없는 현실이 함께한다. 현재도 달라진것은 없다. 대표적인 사회 문제의 하나인 청년실업. 실업자가 300~400만명이라는 통계가 과장된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작 국민의 입장에서 피부 깊숙히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여기서 잠깐!
‘잉여인간’이 ‘오타쿠’나 ‘마니아’라는 단어와 비슷한 의미가 아닌가라는 의문은 품고 있지 않은가?
NO~no~ 엄연히 이 셋의 관계는 다르다.
마니아, 오타쿠 VS 잉여인간
마니아란?
그리스어(語)로 ‘광기(狂氣)’란 뜻이다. 일반적으로 어느 한 가지 일에 열중하는 일 또는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도 한다. 오타쿠 보다는 긍정적인으로 쓰인다.
예) 골프마니아, 낚시마니아, 등
1983년 일본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원래의 뜻은 상대편이나 집안을 높여 불렀던 말이다. 현재는 특정 분야에 대하여 팬이나 마니아 수준을 넘어 득도의 경지에 이름으로써 전문가를 뛰어넘는 수준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특정 분야에만 관심을 가짐으로써 일반적 상식을 결여한 사람 또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회부적응자라고 비하하는 부정적 의미도 띄고 있다. 오늘날에는 일본 대중문화 속에서 하위문화의 중요성이 인식(오타쿠적 요소가 담긴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이 인기) 되어 평가도 달라지고 있으며, 독특한 대중문화 창조집단으로서 다른 나라로까지 파급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오타쿠의
변형으로 '오덕후'를 사용하기도 하며, 어감이 마니아보다 부정적으로 변질된 감도 있다.
'잉여생산물'라는 말을 한번 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쓰고 남은 생산물을 말하다. 잉여의 '쓸모없다'는 뜻이 '잉여인간'으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쓸모없는 인간. 오타쿠나 마니아보다도 어쩌면 어감이 씁쓸하다.
즉, 사회적으로 성공이라는 말에 휩쓸려 삶 자체에서 만족을 찾지 못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스스로 부정적으로 느끼는 사람을 잉여인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화나'의 앨범 자켓>
아... 정말... 요즘엔 경쟁사회에서 쳇바퀴 돌아가 듯 가버리는 하루하루를 받아 들이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잉여가 되버리고 싶은 꿈을 꾼다.(그런 의미로 써본 일기의 한 부분이다.)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자신의 삶을 각자의 방식을 찾아 즐거움을 추구하며 행복의 잣대도 다양해져가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필자의 삶 어느 부분에는 잉여인간이 살고 있듯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한 잉여인간으로써 또 한 그 안에 찾고자 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이제 잉여인간의 잉여짓은 더이상 시간낭비도 비난 받을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의 잉여인간은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성공을 향한 성과 지상주의적인 삶이 아닌, 자신이 하는 일 자체, 어떤 일에 몰두해 시간을 소비하는 일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는 생활 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필자의 주변만 보더라도 자신을 잉여인간이라 칭하고 잉여짓, 잉여생활, 잉여민족의 힘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그것을 인증하고 있다. 또 사람들의 반응은 이런 현상에 대해 눈을 흘기며 보기보다는 동조하기까지 한다. 이 동영상(프랑스인들이 보는 잉여인간)을 보며 함께 우리 시대의 ‘잉여인간’을 느끼길 바란다.
이처럼 어떻게 보면 누가 시켜도 안하는 일은 잉여인간은 잉여짓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개척해서 하나의 컨텐츠를 만들어 냈다. 잉여인간은 본래 사회에 흡수되고 싶어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 때문에 사회 부적응자도 낙오자도 아니다.
디지털 프로슈머란 ?
프로슈머란 공급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로, 생산자이면서 곧 소비자라는 의미이다. 디지털 프로슈머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참여해 콘텐츠를 즐기고 정보와 자료를 얻는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의견을 적극 개진해 생산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디지털 프로슈머는 정보와 컨텐츠 개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기업은 이미 그 생산성과 가치를 알고 '프로 슈머 마케팅'을 통해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고 소비자가 만들어 내는 제품을 생산하고자 한다.
이‘초콜렛폰’은 LG전자 자체 연구원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이것을 만든 주인공들은 프로슈머들이다. 즉 소비자들이 참여해서 만든 핸드폰이다. LG는 ‘싸이언스 프로슈머 그룹’을 만들어 이들로 하여금 아이디어를 내도록 하여 제품을 개발 하게 된 것이다.
<LG전자,초콜렛폰>
건설 회사의 경우도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오픈 하기 전에 주부나 관련된 사람들로 평가단을 구성한다. 이 들을 통해 세밀한 부분까지 아이디어를 주고 받으면서 소비자가 원하는 아파트 제품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점점 더 선호 하는 추세다.
<서울=뉴시스,동부건설주부평가단의 모습>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사회가 바라는 성공의 잣대를 빌려 그 삶을 살지 못해 비하했던 잉여인간이 아닌 자신만의 잉여
짓으로 가치를 높이고 이제 그 안에서 즐길줄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어느 것 하나 쓸모없는 것은 없다. 잉여인간이 다시 대두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성공을 이루고 그런 사람들이 대접받는 알훔~다운 세상이 되어 가는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 디지털 시대야 말로 잉여의 힘을 보여줄 때 인것 같다. 잉여인간이 소비자문화 컨텐츠에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 매김 하는 그날까지 잉여짓과 잉여인간을 지지해보자.